외로움은 정말 나쁜 것일까요?
우리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외로움loneliness을 느낍니다. 외로움은 연결이 막혀있다, 끊겨있다는 느낌입니다. 배고픔이나 목마름과 마찬가지로 외로움의 감정은 인간의 몸이 생물학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라는 싸인을 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듯이 외롭다고 느끼면 연결이 필요합니다.
한편, 고독solitude은 다릅니다. 종종 종교의 성인들은 자기만의 고독한 삶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짧게는 몇 일, 몇 주, 심지어 평생을 봉쇄된 거처에서 혼자 혹은 소수와 함께 살기도 합니다. 보통사람들도 혼자 산책, 등산, 여행, 혹은 명상을 하면서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도 합니다.
하지만 원치 않는 고립은 외로움을 유발하며 고립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합니다. 장애나 질병으로, 실직이나 파산으로, 혹은 사회적 배제나 상처 때문에 고립된다면 외로움을 넘어 삶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슬프게도 어린이와 청소년 중에도 원치 않는 고립으로 외로워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회는 방 안에 칩거한 사람에게 병들었다, 심약하다면서 손가락질하지만 그것은 고립의 벽을 높일 뿐입니다. 그 벽 너머에 웅크린 사람들은 외롭고 두려운 마음으로 다시 연결되기를, 그래서 삶에 생기가 돌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부대낌이 적은, 혹은 거의 단절된 모습으로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만났던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같은 사람은 좋은 상담자가 될 수 있어요. 혼자 외롭게 오래 살면서 많이 생각하고, 많은 것들을 시도해보고 또 좌절해봤으니까요. 그냥 편하게 자란 애들이 세상을 알겠어요?” 저는 “맞아, 그렇네!”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1800년대를 살았던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도 고립된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오늘은 그녀의 시 한편을 소개하며 끝을 맺으려 합니다.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e pain,
Or help one fainting robin
Unto his nest again,
I shall not live in vain.
- by Emily Dickinson -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장영희 옮김)
여러 번역본이 있지만 저는 고 장영희 교수의 옮김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고립과 외로움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내밀어 연결을 통해 생명이 흐르고 다시 살아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한 마리 작은 새를 다시 둥지에 얹어주는 마음으로요. 고립된 사람,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갈 때는 너무 큰 목소리는 좋지 않아요. 너무 빨리 다가가는 것도 불안하게 합니다. 고양이나 강아지에게 옆에서 조금씩 살금살금 다가가듯이, 손부터 내밀어 냄새를 맡게 하고 인사하고 눈을 맞추듯이 조심하는 마음이 존중입니다.
그러나 한편, 고립과 외로움 중에 있더라도 너무 좌절하거나 너무 불쌍히 여기지는 맙시다. 다만 희망을 잃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도 내 안의 나와 연결하고 바람소리와 새소리, 햇살과 달빛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마침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록리본도서관에 있는 초록이는 외로움의 달인이겠죠?)
외로움은 정말 나쁜 것일까요?
우리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외로움loneliness을 느낍니다. 외로움은 연결이 막혀있다, 끊겨있다는 느낌입니다. 배고픔이나 목마름과 마찬가지로 외로움의 감정은 인간의 몸이 생물학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라는 싸인을 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듯이 외롭다고 느끼면 연결이 필요합니다.
한편, 고독solitude은 다릅니다. 종종 종교의 성인들은 자기만의 고독한 삶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짧게는 몇 일, 몇 주, 심지어 평생을 봉쇄된 거처에서 혼자 혹은 소수와 함께 살기도 합니다. 보통사람들도 혼자 산책, 등산, 여행, 혹은 명상을 하면서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도 합니다.
하지만 원치 않는 고립은 외로움을 유발하며 고립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합니다. 장애나 질병으로, 실직이나 파산으로, 혹은 사회적 배제나 상처 때문에 고립된다면 외로움을 넘어 삶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슬프게도 어린이와 청소년 중에도 원치 않는 고립으로 외로워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회는 방 안에 칩거한 사람에게 병들었다, 심약하다면서 손가락질하지만 그것은 고립의 벽을 높일 뿐입니다. 그 벽 너머에 웅크린 사람들은 외롭고 두려운 마음으로 다시 연결되기를, 그래서 삶에 생기가 돌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부대낌이 적은, 혹은 거의 단절된 모습으로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만났던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같은 사람은 좋은 상담자가 될 수 있어요. 혼자 외롭게 오래 살면서 많이 생각하고, 많은 것들을 시도해보고 또 좌절해봤으니까요. 그냥 편하게 자란 애들이 세상을 알겠어요?” 저는 “맞아, 그렇네!”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1800년대를 살았던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도 고립된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오늘은 그녀의 시 한편을 소개하며 끝을 맺으려 합니다.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e pain,
Or help one fainting robin
Unto his nest again,
I shall not live in vain.
- by Emily Dickinson -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장영희 옮김)
여러 번역본이 있지만 저는 고 장영희 교수의 옮김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고립과 외로움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내밀어 연결을 통해 생명이 흐르고 다시 살아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한 마리 작은 새를 다시 둥지에 얹어주는 마음으로요. 고립된 사람,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갈 때는 너무 큰 목소리는 좋지 않아요. 너무 빨리 다가가는 것도 불안하게 합니다. 고양이나 강아지에게 옆에서 조금씩 살금살금 다가가듯이, 손부터 내밀어 냄새를 맡게 하고 인사하고 눈을 맞추듯이 조심하는 마음이 존중입니다.
그러나 한편, 고립과 외로움 중에 있더라도 너무 좌절하거나 너무 불쌍히 여기지는 맙시다. 다만 희망을 잃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도 내 안의 나와 연결하고 바람소리와 새소리, 햇살과 달빛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마침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록리본도서관에 있는 초록이는 외로움의 달인이겠죠?)